가을 전주천의 품에 안겨
가을 전주천의 품에 안겨
  • 전주일보
  • 승인 2017.11.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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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날씨가 화창한 주말이다. 현란한 햇볕의 유혹에 이끌려 전주 천으로 나갔다. 깊어가는 가을햇살이 빗살같이 내려와 대지와 초목에도 부서지듯 내리 쬔다. 주변의 나무들은 빨강, 노랑, 분홍의 고운 색을 한껏 풀어 잎들을 예쁘게 물들이고 있다. 전신에 품고 있는 한 방울의 색소까지 짜내어 그려낸 가을은 찬란하다.

남천교 밑으로 내려가 한벽당 쪽 천변을 따라 걸었다. 산책길이 끊어진 듯 이어지고 감돌며 구불구불 잘도 나 있다. 햇볕은 포근하게 내리쬐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여서 산책하기에 알맞다. 햇볕을 쬐면 비타민 D가 많이 생성된다던가. 가을 경치를 구경하고, 심신을 단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길옆에는 가다가 지치면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있고, 간간이 운동기구도 있어 지루함을 달랠 수 있다. 물이 막힘없이 잘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시원하게 내주고 주변을 깨끗하게 가꾸고 정리하였다. 시민이 자유롭게 걷고 사색할 수 있는 휴식처로 탈바꿈해서 편리하기도 하지만 운치가 있다. 모두가 인간을 중시하고 질 좋은 삶을 위해 작은 것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개선해 나가는 의지가 가상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본 전주천의 지저분하고 악취 나던 모습은 사라지고 수정처럼 맑은 물이 속살거리며 가볍게 흐른다. 어찌나 맑은지 흐르는 물을 한 움큼 마시고 싶은 충동마저 인다.

텃새처럼 눌러 사는 아기 청둥오리들이 부리로 깃털을 쪼아대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간난 아기를 보듯 귀엽다. 먹이를 찾으러 물속 깊이 자맥질을 하며 맛있는 점심을 장만하는 녀석들도 있다. 깨끗한 전주천이 좋아서 눌러 앉아 적응하는 방식이 인간을 닮은 것 같아 기특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청정수역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러운 존재들인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이 순간에도 피폐한 환경 속에서 갖가지 고통과 설움에 노출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자연친화적인 하천으로 복원하면서 1급수에서만 살 수 있는 귀한 어족들, 가족애가 남다르다는 수달, 둥지를 튼 철새가족들의 안식처로 거듭난 전주천이 자랑스럽다. 도심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은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것 같아 마음이 밝아졌다.

속삭이며 흐르는 물 언덕에는 들국화가 함초롬히 피어 향기를 내뿜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자 들국화도 더욱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시원스레 흐르는 맑은 물, 부끄러운 듯 꽃잎을 살며시 내 보인 국화 그리고 울긋불긋한 단풍이 앙상블을 이루어 전주천은 가을의 고즈넉함에 잠겨 가고 있다. 멀리 떠나지 않고 가까운 전주천변에서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를 한껏 완상(玩賞)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저만치에 못 보던 새 다리가 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보았던 오목교인 듯싶다. 아취 형으로 멋지게 놓인 다리 위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남녀와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한벽문화관에서 국립무형유산원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지만, 자동차는 건널 수 없는 도보용 교량이다. 새 다리를 건너볼까 하다가 다음기회로 미루고 계속 걸었다.

기린처럼 긴 목을 내 빼고 서 있는 갈대들이 간간이 불어오는 갈바람의 문안 인사에 답하듯 머리를 흔든다. 갈대는 머리가 센 노인처럼 백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다. 비바람 모진세월에 만고풍상을 다 겪다 보니 갈대도 머리가 하얗게 되었을까? 서걱서걱 몸부림치며 내 뱉는 갈대 울음이 빈 하늘로 날아오른다. 갈대숲이나 빈 하늘에는 파삭한 가을을 닮은 마음이 리본처럼 펄럭이고 있다.

흐르는 물을 따라 한동안 오르다 보니 물막이 옆에 어제(魚梯)가 있다. 어제를 갓 넘어온 물은 웅덩이에서 맴돌고 또 작은 어제를 넘는다. 어제를 넘을 때마다 튕기는 물방울들이 가을 햇빛에 영롱하게 빛난다. 한순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했던 물방울은 사라지고 또 다른 물방울이 튕겨 올라 보석처럼 빛난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연달아 튀어 오르는 물방울마다 보석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그 형상은 순간에 사라진다. 물방울 보석이 한순간이듯 우리네 인생도 한순간이 아니겠는가?

한벽당 아래에는 보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은 작은 소(沼)가 있다. 소 위에 내려앉은 단풍잎은 흐르는 물길에 몸을 맡긴 채 한가롭다. 한 무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떠 있는 낙엽을 희롱하며 가을 한낮을 즐긴다. 여름에는 악동들이 물장구를 치는 놀이터요, 겨울에는 썰매나 스케이트로 추위를 이겨내는 명소인데, 가을에는 낙엽에게 자리를 내 준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소는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하는 재주를 보여준다.

한벽당의 부드럽게 굽어진 추녀가 반대편 언덕의 빛 고운 단풍과 휘휘 늘어진 버들가지와 함께 수면위에서 조화를 이룬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운치 있는 가을 풍경이다. 서호가 이태백의 시심을 불러 일으켰다면 이 작은 물웅덩이가 나를 만추의 화폭으로 이끌고 있다고나 할까? 전주 천은 그렇게 가을의 정취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고 있다.

백금종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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