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리고 벌초 이야기
추석 그리고 벌초 이야기
  • 전주일보
  • 승인 2017.09.1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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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정 현/수필가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벌초가 시작된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드러내는 벌초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 후손들의 서있는 자리가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얼마나 든든한 삶의 땅으로 엮어져 있는지 절감한다. 그러나 온갖 잡초와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묘지들을 보면, 먼저 마음이 답답해진다. 수많은 묘들마다 그 나름의 사연들과 생존 시 삶의 역사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런 생존 시 인생의 업에 따라 후손들의 벌초에 대한 정성의 손길이 달라지는 게 아닌가 한다. 생전에 쌓았던 재산과 덕행이 후손들에게 물려져서 가풍과 문중의 힘에 실려 벌초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벌초의 의미는 돌아가신 조상들의 모든 덕목과 정신적 영향이 응축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많이 남겨서, 어떤 사람은 정치적 명성과 유산을 잘 물려주어서, 어떤 사람은 학문적 성과를 남겨 주어서 일 것이다. 단지 혈연적 인과관계 외에 아무것을 남기지 않았어도 후손들은 벌초에 동참한다. 그것은 후손된 자로서 미풍양속을 따르고자 하는 경우다. 제각기 사연은 다르지만 벌초의 손길은 아름답다.

  그런데 특별한 사정이 있어 벌초를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고의나 우연을 막론하고 묘지에 무성한 잡초와 나무로 가득한 곳이 있다. 그렇게 무심히 추석을 보내는 무덤들의 모습을 보면, 그 후손들의 행동과 속셈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종교적 관행이나 관점에 따라 묘지의 황폐화를 방치하는 행위도 아름답지 못하다. 조상이나 부모의 묘지 앞에서 영의 유무를 떠나 돌아가신 분들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고 마음과 마음으로 따뜻한 추억을 교류하면서 예를 표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돌아가신 선조의 명예가 이유 없이 더럽혀지면 후손들은 발 벗고 나서서 그 누명을 벗겨드려야 하듯,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잡초로 뒤덮인 묘지를 벌초하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의무다. 해마다 벌초의 어려움으로 화장이나 납골당의 추세로 나아가는 현실에 비추어 차츰 벌초 행렬이나 그 문화가 사라져가려니 싶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우려스런 현상도 아니다. 그 편의성과 후손 본위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묘지가 있는 한, 후손들의 벌초시행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후손들이 절손되거나 부실하여 묘지를 황폐화시켜 흉물처럼 남겨놓은 것을 보고, 일부 지방자치단체나 각종 사회봉사단체가 발 벗고 나서서 묘지를 벌초하는 모습을 보면 의기意氣의 마음이 인다.

  홀로 벌초할 때보다 여럿이 힘을 합쳐 구슬땀을 흘리며 벌초를 하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험난한 방식의 생각에서 가능성을 여는 방식의 실천으로 매끄럽게 건너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후손들이 함께 모여 웃음꽃을 피우며 자랑스럽고 떳떳한 자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덕목일 것이다. 문득 가슴에서 품어 나온 벌초 시 한 수를 읊는다.

 

벌초 단상

 

조상님! 하고 크게 불러봅니다

웃음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당신과 한 시대의 역사를 주관했던

옛 시절이 못내 그리워

여기 다시 미욱한 몸으로 섰습니다

당신은 어서 오니라 하시며

풀을 베는 손길에 힘을 보태 주시겠지요

잠시 눈을 감으시옵소서

무수수한 풀들이 혼령의 눈을 찌를까 염려 됩니다

눈물 없이 생각만으로 사모함을 용서해주세요

떨리는 가슴은 늘 당신 편에서 그리움을 키웠습니다

오늘만큼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시고

후손들의 무례한 발자국을 지켜보아주심이 어떤지요

우리는 시간을 건너와 이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옥한 시절엔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감을 느낍니다

이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후손들을 해량하여 주시고

명험이 깃든 혼령의 기로 우리의 일이 탈이 없도록 지켜주셔요

오늘 땀방울이 흘러 당신의 쉼터를 적실 때마다

우리의 불효가 잠시나마 작아짐을 허락하여 주시고

험난한 세상의 삶이 당신과 함께 하여

울음 없는 복락이 오게 됨을 용인하시면

태양이 더 많은 시간을 이 지상에 온기를 줄 듯 합니다

우리 나이 듦이 점점 서러워지는 세월에

당신의 평안이 이 땅의 효심에 핀 꽃임을 알게 해주시고

삶의 질서를 따라간 세상 모든 어버이의 흔적으로

후손이 번성하게 된 근본임을 함께 깨닫도록 하여 주셔요

지상과 지하는 사랑의 벌초로 이어져

우리의 가슴은 당신의 흐뭇한 웃음과 함께

마냥 뭉클한 하루를 맞고 있습니다.

황정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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