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木瓜)의 유혹
모과(木瓜)의 유혹
  • 전주일보
  • 승인 2017.08.3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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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정 정 애/화가, 수필가

겨울이 가까워 오는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정읍사문학상을 받게 된 아들의 시상식에 참석하려고 우리 내외도 그와 함께 정읍행 시외버스를 탔다. 창밖에 스치는 가을은 이미 떠날 채비를 끝내고 마지막 열정을 다 뿜어낸 뒤에 탈진해가는 듯 힘겨워 보였지만, 가을이 원래 보여주던 쓸쓸함과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며 이제 떠나려 한다는 이별의 의미를 전해오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가을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떠나며 추운 겨울을 안내하면서도, 그 또한 지나가면 다시 푸름으로 돌아올 것을 예고했다.

정읍에서 정읍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을 마치고 전주행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다.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모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며 사달라고 사정을 했다. 바구니에 담긴 모과가 탐스럽지는 않았으나, 노인의 애잔한 시선에 마음이 움직였고, 모과 특유의 노란 빛깔과 윤기 나는 과피(果皮)에 호감이 갔다. 시중 가격보다 조금 비싼 듯했지만 그것을 몽땅 사버렸다. 집에 와서 소쿠리에 모과를 옮겨 담으려고 비닐봉지를 풀어헤치는 순간 진한 모과향이 강하게 코를 찔렀다. 정읍의 비옥한 토질과 맑은 공기, 풍부한 햇빛을 받아 갈무리한 자연의 섭리가 가득했다. 내장산의 색깔 진한 단풍 냄새까지 배어 있는 듯 향이 진하고 상큼했다.

모과가 어렸을 때는 그의 잎사귀 색깔과 거의 같은 색의 작은 열매지만 가을이 가까워지면 그 몸집이 부쩍 커지고 색깔도 차츰 노랗게 변해간다. 나무의 잎과 줄기와 뿌리에서 열심히 벌어들인 영양소들을 과육에 몽땅 담아 독특한 색과 향기로 빚어낸다. 그 향기와 색깔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과육 속에 든 씨를 멀리 보내어 움트게 하려는 생명의 전략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생선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옛말이 있다. 감이나 사과처럼 모양이 예쁘고 색깔이 화려하지도 못하고 울퉁불퉁한데다가 군데군데 상처 같은 흠결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맛도 떫고 은은한 향기를 빼면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과일이다. 그러나 나는 거의 해마다 가을이면 모과를 사들였다. 모과가 보여주는 조금은 슬픈 노란색과 그가 품고 있는 향기는 가을의 쓸쓸함과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모과를 몇 개 남겨두고 보는 일이나, 과육을 잘라서 즙을 담아두는 마음은 떠나는 가을을 집안에, 내 가슴에 남겨두려는 사소한 욕심일 것이다.

소쿠리에 모과를 옮겨 담으며 모양새가 잘생긴 몇 알을 따로 챙겨 놓았다. 정물화(靜物畵) 모델로 쓸까 해서였다. 그리고 나머지 모과는 모두 물로 씻어서 소쿠리에 담아놓고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마와 칼, 커다란 양푼 그리고 설탕을 챙겨 모과 발효액을 만들 준비를 했다. 도마 위에 모과를 올려놓고 반으로 뚝 자르니 중심에 박혀 있는 까만 씨앗 몇 개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너는 어쩔 수 없어. 과육(果肉)과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섭섭하겠구나!”

“아니랍니다. 못났지만 향기로운 과육 덕분에 씨앗인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과육은 할 일을 다 한 셈이고, 저를 좋은 땅에 버려주시기만 하면 완전히 성공한 셈이지요.”

씨를 빼내고 과육을 얇게 썰었다. 모과의 무게와 같은 양의 설탕을 저울에 달아서 그릇에 챙겨놓고 커다란 양푼을 준비하여 썰어놓은 모과와 설탕을 뒤섞었다. 유리로 된 커다란 병에 모과와 설탕을 켜켜이 넣고 꾹꾹 눌러 담근 뒤 뚜껑을 덮었다. 김장을 끝낸 날의 뿌듯하고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즙이 우러나 흥건하게 차올랐다. 그 모과 즙은 향이 좋은 모과차가 되기도 하지만 목감기에 효험이 있는 약이 되기도 한다.

겨울방학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 내가 아끼는 제자 하연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목소리가 잠겨서 통화가 원활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가 목소리가 잠겨 있으니 수업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때 퍼뜩 모과 발효액이 생각났고, 정읍에서 모과를 사온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반찬 몇 가지와 모과 발효액이 담긴 유리병 하나를 챙겨 그에게 전했다. 며칠 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모과 발효액을 먹고 신통하게도 목이 트였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목소리를 찾은 통화가 참 다행스러웠다.

병이 있으면 약도 있다는 옛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한 병 남은 모과 발효액은 겨우내 우리 식구들의 목소리를 지키는 건강 음료로 사용될 것이다. 늦가을에 모과를 만나 아직도 내 집에 가을의 향기를 남겨두어 쓸쓸함과 그리움의 아린 멋을 느껴볼 수 있음이 고맙다. 못생겼어도 참 신통하고 유익한 과일, 모과를 위하여 그 씨앗을 완산칠봉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어야겠다.

 정정애 / 화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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