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
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
  • 전주일보
  • 승인 2017.08.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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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 선 / 수필가

우리 아파트 길 건너 동네 우체국 앞에 우체통이 하나 서있다. 오늘에야 눈에 들어온다.

우체국 바로 앞에, 우체국을 드나드는 계단을 내려서면 겨우 대여섯 걸음이 채 되지 않는 곳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다. 오래 전과 변함없이 빨간 옷을 걸치고 있다. 여름에는 좀 시원한 색옷으로 갈아입을 줄도 모르는지. 아예 갈아입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편지를 부탁하는 누구라도 저를 찾아온다면, 찾아와 저에게 편지를 잘 전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면 폭염 아래인들 어떠랴. 한겨울 추위쯤이야, 또 무슨 큰일이겠는가. 한 생을 다하도록 견디며 기다려도 조금도 괘념치 않겠다는 얼굴이다.

그 동안 우체국에 수없이 발걸음을 하면서도 나는 그를 무심히 지나쳤다. 우체국 맞은 편 아파트에서 살며 이십 여 년, 오가며 한 번 쯤은 눈길이 머물었어야 옳을 일이다. 다정은커녕 유정한 눈길 한 번 보낸 적이 없다.

그 많은 소식들을 들고 우체국 안으로 바삐 들어서는 사람들, 그에게 편지를 부탁하던 일은 아주 옛날 일인 듯 모두들 무심하다. 이제는 생각 밖으로 잊어진 죽음 같은 것일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잔해만 앙상한 유물일 뿐일까.

젊은 날, 밤을 새우며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은 아침 일찍 우체통을 찾아가 살며시 편지를 밀어 넣으며 가슴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우체통에 편지가 잘 들어갔을까, 다시 돌아보며 집으로 와서는 아, 편지를 보낸 날은 하얗게 밤잠을 설쳤지. 편지는 잘 받아보았을까. 답장은 언제나 올까. 기다리며 마음 따뜻해지던 날들이었다.

오늘은 우체국에 나가 요즈음 새로 인사를 나눈 몇 분 문우들께 답례를 겸하여 내 책을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길. 그늘진 우체국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일삼아 기다려본다.’ 누구 한 사람 밤 새워 쓴 편지를 들고 와서, 이 편지는 꼭 전해야 한다고, 잘 부탁한다고, 허리 숙여 우체통에 넣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까.

과연 저 우체통에는 짤막한 한 장의 엽서라도 들어있기는 할까. 들어있다면, 그가 보낸 소식이 수신인에게 무사히 가 닿으리라고 믿고 있을까. 아니면, 밤샘하며 쓴 편지가 수신되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도 망설이며 편지를 넣고 눈물겨워 돌아간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서 영영 떠나가 버린 사랑에게 다만, 요즈음 잘 지내고 있다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헛된 밤을 새운 안부편지도 들어 있을까. 반시간 넘어 한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쪼그리고 앉아있는 내가 혹은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닌지,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린다.

저기 외롭게 서있는 우체통을 우체국에서 열어보기는 하는가. 그냥 우체국 앞이 허전하여 세워둔 것은 아닐까. 나처럼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며 바라보라고, 바라보며 맘껏 헛된 생각이라도 가져보라고. 우체통 안에는 아주 오래된 편지들 몇몇도 무심한 사람들, 무심한 시간들을 지나 누렇게 바랜 채로 바닥에 잠겨있을지도 모른다. 언제 한 번, 우체국 창구의 언니들에게 물어볼까. 지금도 저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도 되느냐고.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는 날로부터 나는 편지를 보내고 받는 일이 얼마쯤은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지난 날, 꿈같은 사연을 쓴 편지를 보내고 기다리던 날들이 한 번에 무너져 주저앉듯 쓸쓸해질지도 모른다. 그만 일어서야지. 엉덩이가 몹시 아프다.

자리를 털고 계단을 내려와 모처럼 우체통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방금이라도 누군가 밤 새워 쓴 편지를 가져와 우체통에 넣지 않을까. 종일 기다려보면 단 한 사람 그런 이를 만날 수도 있을까. 하지만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이는 없었다. 내일은 나, 누구에겐가 편지를 써서 저의 외로움을 달래볼까.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영혼처럼 나 또한 그를 위로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저 은자의 침묵을 사는 듯 의연한 그를 향해 전과 다르지 않게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함없이 거기 있어주기를 바라는 내 진정을 건네며 전보다 훨씬 더 유정해지는 것이 어떨까.

이제부터 남다르게 그를 만나리라. 오래 전에 내가 그에게 부탁했던 안부들도 어제인 듯 내 가슴속에서 다시 꺼내리라. 그 안에서 맑게 눈을 뜨는 사연들. 하면, 내가 그에게 넘겨주었던 젊은 날의 기쁨과 슬픔과 방황과 혼돈을 써 내려갔던 비밀스런 문장들과도 다시 해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내가 어찌 그에게 유정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 동네 우체국 앞 빨간 우체통! 뭇사람의 무심한 눈길도 괘념치 않고 하루하루를 무너지고 있는 우리들 시간의 적적한 풍경이라니! 그와 내가 함께 저무는 하루의 슬픈 찬란함 이라니! 그도 나와 함께 오늘은, 하늘을 떠도는 회색구름으로 풍화되는 날들을 아프게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정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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