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 전주일보
  • 승인 2017.08.1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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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고운 /수필가, 사진가

두툼하고 후덕해 보이는 얼굴, 친구의 오래 전에 보던 얼굴이 모니터위에 너부죽하다. 큼지막한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응시하는 시선에는 열정이 숨어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번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지 않는 입담의 출구이고 청탁불문, 노소불문의 진리(?)를 추구하는 주도(酒道)를 지키며 한없이 술이 들어가던 입에는 가벼운 미소가 살포시 걸려 있다.

나이 들면서 하나 둘 생겼던 얼룽덜룽한 검버섯도 사라지고 깊이 팬 주름살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10년 이상 젊어진 친구의 얼굴이다. 처진 눈자위가 다시 팽팽해지고 흐릿했던 시선은 불이 켜진 듯 형형하다. 내가 세월을 주무르고 시간을 거슬러 그에게 젊음을 주었다. 신들의 세계에서나 꿈꿀 수 있을 법한 일이 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요즘 타임 슬립(Time Slip)이라고 부르는 시간여행 드라마를 각 방송국이 한창 유행처럼 방영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나 미래로 가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나 궁금증이 현대 기술을 업고 현대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내가 사진 수정을 통해서 시간을 되돌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이룰 수 없는 것을 들라면 단연 죽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욕망이 과거로의 회귀나 미래의 세계를 동경하는 현상으로 갖가지 문학이나 예술을 통하여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 귀의하여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생각된다. 점점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추레해지기 시작하면 ‘늙었다’고 한다. 늙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늙음은 곳 죽음이 가까웠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회 사진 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받아 전북 도내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무료 영정사진을 찍어드리는 봉사를 했다. 교통이 불편한 산골이나 섬 지역을 찾아다니며 노인들의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 올려 보면 얼굴엔 시간과 고생의 흔적이 깊은 골짜기를 이루도록 패어 있었다.

주름살도 다 지워서 젊고 예쁘게 만들어드릴 터이니 깨끗이 세수하고 얼굴에 기초화장품 외에는 바르지 말라고 당부를 하지만, 노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금목걸이나 번쩍이는 장신구도 하지 말도록 당부해도 사진을 찍겠다고 의자에 앉을 때는 온갖 장신구를 다 챙겨 칭칭 감고 나왔다.

그을리고 찌부러진 얼굴에 하얗게 화장을 하면 피부를 옮겨 붙일 수가 없어서 수정을 할 수 없다. 맨얼굴을 촬영해야 피부를 살려 자연스럽고 젊게 고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사진을 찍으러 들어오는 노인들은 하얗게 바르고 왔다. 조금이라도 젊게 보이겠다는 마음, 아직은 저세상으로 갈 때가 되지 않은 듯, 조금이라도 젊은 모습으로 남고 싶은 노인들의 갈망을 탓한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내가 나이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눈 한쪽이 없는 노인, 코가 내려앉은 노인, 입술이 뭉개져 내려앉은 노인 등등 세월과 병마에 본디 모습을 빼앗긴 노인들의 시간을 되돌려서 사진틀에 넣어 나눠주면, 어느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했고, 괴춤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를 한사코 쥐어주려는 이도 있었다. 그분들에게 내가 만들어준 영정사진은 기적처럼 생각되었고 아직은 죽음의 버스에 타지 않아도 되는 위로였을 것이다.

내 사진 취미가 만든 또 하나의 아픈 그리움이 있다. 내 평생 모델이던 아내가 마흔 중반 무렵에 원초적 모습으로 모델이 되어준 사진이 있다. 젊음이 거의 떠난 시기였지만, 내 꼼꼼한 재생술로 피부가 살아나고 볼륨이 조절되어 그녀는 세월을 거슬러 아름답게 돌아왔다.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가끔 컴퓨터에서 걸어 나와 내 가슴에 불을 지피기도 하고, 그리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나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앨범 속에서 오르내리며 세월의 흔적들을 더듬는다.

사진 속의 아내는 멈추어진 세월 속에서 항상 젊고 아름답다. 화사한 미소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그 사진을 몇 번이나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자꾸만 설레는 가슴,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아내의 영혼이 있다면 그 사진 속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설레고 아파도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난 그녀를 불러낸다. 어쩌면 아내는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그렇게 밝고 예쁜 모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사진은 그리움이고 추억이며 시간여행을 떠나는 티켓이다. 사진을 수정하여 이런저런 변화를 주는 일이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장난 같지만, 누구에게는 타임머신이고, 그리움이거나 서러움이 된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있는 일이나, 떠난 뒤에 사진으로 남는 일은 생명이 있고 없음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한한 생명이 오래도록 남는 방법으로는 사진처럼 확실하고 쉬운 것도 없을 듯하다.

그립다면 사진을 펴자. 앨범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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