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달리는 고향길
하늘을 달리는 고향길
  • 전주일보
  • 승인 2017.07.0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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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광 섭 / 수필가

벚꽃이 다 지고 푸른 잎이 제법 자란 듯 보이던 어느 늦은 봄날, 장계 고향에 갈 일이 있었다. 전주 동물원 담을 끼고 돌아가는 길가에 복사꽃이 화사한 얼굴로 맞아 준다. 호반촌의 우리 집에서 고향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운치가 있고 차들이 쌩쌩 달리지 않는 이 길을 통해 완주 IC를 이용한다. 송천동 3거리에서 전북대학교 뒤의 고갯길을 넘어 동물원 길로 접어드는 이 길을 가노라면 서둘 일이 없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구릉진 언덕길을 굽이 돌아가며 아름다운 풍광이 마치 고향길 같아서 내가 이 길을‘무릉도원 길’이라 이름 지었다. 이 무릉도원길에 접어들면서부터 내 마음은 고향 언덕에 가 있게 된다.

 

완주 IC를 나와 소양을 지나면, 만덕산(763m)을 향해 오르는 가파른 길이 나온다. 산허리를 굽이굽이 도는 고갯길에 이르면 모악산이 시야에 들고, 고덕산은 지척에 있다. 운장산도 고개를 내민다. 그런가 하면 고가고속도로 아래로 옛적에 다녔던 곰티재[熊峙](427m) 길이 까마득히 먼 발아래 있고, 신촌 마을도 멀리 보인다. 1950년대엔 낡은 군용 트럭을 개조해 만든 버스로 길이 좁아 차량이 서로 만나면 피해 가기도 어려운 곰티를 넘어 다녔다. 더구나 비포장 자갈길이어서 장마철에는 곳곳이 패이고 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아흔아홉 구비 고갯길을 오르는 버스는 고물엔진이어서 힘도 부족했지만, 드럼통을 두들겨 만든 차체가 좌우로 흔들거리면서 넘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삐거덕거리며 흔들리는 버스가 금방이라도 천 길 낭떠러지로 구를 듯 무서워서 재를 넘는 40여 분간은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 길보다 약 100m 위에 고속도로가 생겨 하늘을 나는 듯 달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든다.

 

그 시절의 곰티재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를 잇는 고갯길이었다. 좁고 눈이 쉬 녹지 않아 미끄러웠기 때문에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북향으로 난 길이라 결빙구간이 많았다. 따라서 교통사고도 잦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2월 초였다. 아직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인데, 내 생일(음 11/9)에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고 고향 집에 내려갔었다. 생일날 아침에 밖을 보니 눈이 50cm 정도 쌓였다. 버스가 다닐 수 없으므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전주를 향해 걸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헤치고 걷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다행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일행을 만나 서로 격려하며 걸을 수 있어서 힘이 되었다. 점심때를 넘겨서야 진안읍 내 외갓집에 들러 배를 채우고 곰티재를 향해 줄달음치던 일이 아련하다. 곰티재에서 신촌마을로 내려오는 지름길이 있어서 퍽 고마웠지만, 칼바람이 몰아쳐 앞을 보기 어려운 가운데 산길에서 넘어지고 빠져가며 일행들과 고함으로 서로를 격려하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신발과 아랫도리가 다 젖고 손발에 감각이 무디어져 미끄럽고 중심을 잡기도 어려운 산길을 걸으며 일찍 세상사는 일이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60년에서 두 해 모자라는 옛이야기다.

 

2007년 12월,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부터 35~40분이면 장계에 갈 수 있다. 걸어서 전주에 가야 했던 그 먼 옛날의 내가 지금은 노인이 되어 자동차라는 축지법으로 순식간에 오갈 수 있다. 만덕산 자락을 오르는 교각은 98m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 이렇게 높은 교각 위에 만든 도로를 달리면 비행장을 이륙하는 항공기를 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만덕산 자락에 연무(煙霧)가 피어나면 구름 속을 거니는 듯하고, 청명할 때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듯하다.

 

내 고향 장계(長溪)는 벽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무진장(茂鎭長)의 중심지다. 동(東)으론 대전, 서(西)로는 남원, 남(南)으로는 경상남도 함양, 거창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해발 360m~700m의 분지라 기온이 전주와는 5도 차이가 난다. 여름엔 서늘하며, 겨울엔 눈이 많고 더 춥다. 금강의 발원지인 장안산, 남덕유산이 어깨동무하고 있어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 시골 출신이라 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칸추리(Country man, 촌놈)라는 소릴 들어왔어도, 산천경개가 빼어난 곳에서 자랐던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고향이 고향 같지 않다.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거의 떠나 타향 같은 고향이 되었다. 초등학교 친구도 고향보다는 전주에 대부분이 산다. 그러니 머물 일도 별로 없고 핸드폰으로 소식을 주고받으니 궁금할 일도 없다. 하지만, 편리한 세상에 사는 건 좋으나, 훈훈한 인정이 넘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리운 건 아마도 내가 늙은 탓일 게다.

오늘도 선영 사초(莎草) 관계로 ‘하늘을 달리는 고향길’을 30분 만에 주파했다. 자동차로는 2시간 30분, 걸어서는 하루 종일이 걸리던 60여 년 전으로 잠시 타임머신을 탔었다. 문광섭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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