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빗소리
  • 전주일보
  • 승인 2017.06.0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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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고 운 / 수필가

선선한 기운에 낮잠이 깨었다. ‘쏴아-’하는 빗소리와 함께 비보라가 바람에 날려 창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고 우르릉 쿵쾅 번쩍번쩍 요란한 소리와 섬광이 방안에 가득해진다. 거창한 소리와 함께 내리는 세찬 빗줄기는 축복이었다. 갈망하던 비를 만난 모든 것들이 지금 깨어나고 살아나고 있을 것이다. 요즘 어쩌다 내리던 비는 그저 감질만 내고 지나갔다. 어쩌다가 오늘 모처럼 비답게 퍼부어주고 있다.

오늘 새벽에 자전거 운동을 나가 구이 저수지 무넘기 아래까지 다녀왔다. 저수지 밑은 관개수가 풍부한 지역이어서 작물들은 이상이 없었지만, 물이 넉넉하게 흐르던 삼천이 군데군데 맨바닥을 드러냈다. 물이 있는 곳도 자작하게 남아 곧 자갈밭이 드러날 듯했다. 저수지의 수위도 너무 낮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옥수수가 익어 수염이 고스러지고, 참깨 꽃이 예쁘게 피기 시작했다. 참깨 꽃 사진을 찍으러 밭에 들어가서 김을 매는 노인에게 물었다.

“가물어서 그런지 밭이 좀 푸석푸석해 보입니다.”

“비가 감질만 내고 안 와서 고추랑 깨랑 모두 그만해요. 덥기만 하고 소나기도 안 오니, 뭔 날씨가 이러는지…….” 아직 작물이 타들어가지는 않지만, 비가 와야 대지의 기온도 내려가고 작물도 제대로 자라서 안정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창문 너머 하늘에서 생명줄기가 쏟아지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 지면서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완산칠봉의 까치들도 내리는 비가 반가운지 “깍, 꺅꺅, 꺽꺽” 목청껏 떠들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쫓고 쫓기며 사랑 놀음이 한창이다. 까치 소리가 잦아드는가 했더니, 박새, 때까치, 곤줄박이, 그리고 이름 모르는 새들의 노래가 “삐삐, 찌찌, 짹짹” 합창을 한다. 아마도, 물을 찾아 헤매야 했던 새들이, 내리는 비에 갈증을 풀며 신바람이 나서 부르는 노래일 듯하다. 비가 내려야 습기가 많아져 벌레도 많이 생기고, 곤충들도 불어나 먹을거리가 많아질 터이므로 새들도 비를 많이 기다렸을 것이다.

오늘 낮에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모악산에 갔다. 왕복 2시간 거리인 천룡사까지 갔다가 내려왔다. 나는 모악산에 가면 항상 천룡사 쪽을 오르면서 계곡에 흐르는 물속을 들여다본다. 그 맑은 골짜기에는 작고 까맣게 보이는 버들치들이 놀고 있었다. 졸졸거리는 물에 작은 것들이 살아가느라 깜냥을 다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고 예뻤다. 가끔은 내려오다가 찬 물에 발을 담그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고, 고기들이 발을 쪼기라도 하면 간지럽고 앙증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내려오면서 계곡을 살펴보니 위쪽에서는 물을 볼 수 없었고, 거의 다 내려온 사랑바위 다리 근처에서부터 물이 보였다. 물은 있지만, 흐르는 물길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물길이 끊어진 채 고여 있었다. 조금 더 내려와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물이 자작하게 마른 곳에 작은 버들치 몇 마리가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죽어있다. 물이 흐르지 않아, 작은 웅덩이에 살던 고기가 죽은 것이다. 오늘 밤 비 소식이 있으니 조금만 버텼더라면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이 더했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오니 작은 웅덩이에 2~30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있었다. 그 고기들을 물이 더 많은 곳으로 옮겨 줄까 생각하다가, 일기예보를 믿기로 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저문 오후에 잠에서 깨었을 때 내리던 비가 내리다 긋다하며 밤까지 내리고 있다. 열기를 뿜던 숲에서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숲이 본디 냄새를 회복하여 나무에 내린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느라 숲이 수런거리고 있다. 지금쯤 모악산의 작은 녀석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큰 웅덩이로 헤엄쳐 갔을까? 밤이 되었으니 옹기종기 모여 그 앙증맞은 작은 지느러미를 가만가만 움직이며 자고 있을까? 만일 오늘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작은 녀석들을 큰 웅덩이에 옮겨주지 못한 아쉬움으로 크게 자책하고 있을 뻔했다. 비는 말라가던 밭작물들과 웅덩이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물고기들에게 생명을 주었고, 내게는 안도와 기쁨의 휴식을 주었다.

비가 내리다 긋다 하지만, 내일 오전까지는 내린다니, 그런대로 해갈(解渴)은 될 성싶다. 아마도 지금쯤 모악산 계곡의 물고기들은 새 물을 만나 신바람 나게 상류로 헤엄쳐가고 있을 것이다. 그 작은 녀석들의 몸놀림이 눈에 선하다. 내일 아침에는 촉촉이 젖은 소나무 숲의 새들이 빗물에 살아난 모든 것들과 하모니를 이루어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나를 깨울 것 같다. 은혜처럼 내린 생명에 모든 것들이 깨어나 싱싱한 세상이 열릴 것이다. 잎사귀 끝에 매달린 청량한 아침이슬을 받아 마신 박새가 찌르륵 찌르륵 부르는 노래 소리, 아침 햇살이 조롱조롱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을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그런 시간을 위하여 내일은 일찍 완산칠봉 산길을 올라가 보아야겠다.

김고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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