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날, 二題
비 개인 날, 二題
  • 전주일보
  • 승인 2017.05.2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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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정 선 / 수필가

1.

비 개이고 모처럼 밝은 날 오후. 사방이 모두 맑은 기운에 싸여있다. 하늘에는 흰 구름도 떠간다. 흔히 보아오던 맑은 날과 하늘이 이제는 어제 없던 새날인 듯 새로워 보이고 마음도 따라 설렌다. ‘길에 쌓인 먼지도 많이 쓸려 나갔겠지’ 서둘러 집을 나섰다. 고향인 구이 쪽으로 두어 시간 정도 걸어볼 생각이다. 모악산 입구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저수지 아래 고요히 가라앉은 고향동네 우리 집도 한참을 들여다보고 올 수 있으리라.

평일이어서 길을 오가는 차들도 수가 좀 줄어든 것 같다. 문정초등학교를 지나 잘 정리된 논길을 따라 걸으면 찻길의 소음도 견딜만하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황사가 날아오고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는 경고 문자가 오기 마련이라 오랜만에 나선 길이 문득 낯설기도 하다. 저 지난 해 까지도 주중에 한 두 차례는 이 길을 따라 걸었다. 더 앞서서는 모악산에 자주 다녀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오늘이 생애 가장 젊은 봄날 이라고 건배하며 유쾌하던, 함께 나이 들어가던 문우들도 요즈음은 만나는 일이 뜸하고, -나이 들수록 봄날은 아름답다고 만나면 반갑게 안부 말씀을 주시는 문단의 어른들도 뵙는 기회가 자꾸만 줄어든다. 하물며 모악산 아래, 고향을 지키던 어린 친구들이야 두서넛이 이미 먼 길을 떠나 이제 더는 가끔씩 모여앉아 맘껏 떠들며 흉도 보며 즐거울 수도 없게 되었다. 하교 길에 나를 따돌리고 희희낙락 저들끼리 산 넘어 달려가 버리던 머스매들. 함께 따라가지 못하고 산길이 무서워서 혼자 울며 넘던 일. 산길은 희미해지고, 동네는 오래전에 물속에 잠겼다.

길을 걸으며 그립고 쓸쓸한 생각들이 자꾸 앞을 선다. 나이 때문인가. 모처럼 밝고 맑은 하늘 아래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일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2.

정오 무렵이었다. 시내를 다녀오는 길에 집까지 걸어볼까 하고 걷고 있었다. 행여, 초가을 날씨인 양 하늘 저 높은 곳까지 맑게 비어있었다. 그 많은 먼지가 비에 깨끗이 씻겨 내린 때문일 것이다. 교대부속초등학교를 조금 지나 왔을 때였다. 여자 노인 한 분이 나를 조금 앞서 걷고 있었다. 아마 나처럼 건강을 생각하여 집까지 천천히 걸어보자 하고 있었던 길인지도 몰랐다. 나도 천천히, 그대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노인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뒤따르다 걸음걸이가 너무 느린 것이, 아무래도 앞서야겠다고 생각되어 걸음을 조금 서두르는 순간이었다. 무난하던 어른께서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지는 것이었다. 비 온 뒤 물이 스며있어 길이 미끄러웠던가.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곁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의식은 있었다. 하지만 말을 건넬 수 없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찌할 줄도 모르고 어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힘이 부족했다. 급히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고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차에 태울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서둘러 가까운 병원으로 가 달라고 앞뒤 모르는 부탁을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쉽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한 동안을 그 자리에 붙잡혀 있다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멍멍했다. 노인은 어찌 되었을까. 택시 기사께서 병원에 잘 데려다 주었을까. 나도 함께 가지 못한 것이 뒤늦게 생각되었다.

둘러보면, 세상에는 내가 그렇게 어려운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앞장서서 해결해 나가는 훌륭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읽고 감동하면서도 정작 우연히 내 도움이 필요한 일과 마주치게 되어서는 어마두지 하다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후회하게 되는 것이 어디 그 뿐인가.

남을 위하여 완벽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습관처럼 다가가서 아무 일 아닌 듯이 자신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이들, 그들 앞에서 나는 또, 생각만을, 빈 마음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운 날이었다.

최정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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