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 이광사
원교 이광사
  • 전주일보
  • 승인 2017.04.1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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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천은사(泉隱寺)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다. 828년(흥덕왕 3) 창건 당시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감로사(甘露寺)라 했다. 임진왜란 피해로 절이 불탄 뒤 중건할 때였다. 샘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다. 인부들이 잡아 죽였더니 샘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원인 모를 화재 등 재앙이 계속됐다.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년)가 찾아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다. 그 뒤로 재앙이 멈췄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가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에 대흥사에 들렀다. 원교의 글씨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을 보고 당장 떼 내라고 지시했다. 글씨도 아닌 것을 걸었다는 뜻이다. 그 만큼 원교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평가는 혹독했다. 그런데 추사의 유배생활이 60대 중반이 되어 끝났다. 그는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한 마디 했다고 한다. "다시 보니 괜찮군". 추사는 자신이 쓴 예서체 편액 '무량수각(无量壽閣)'을 원교의 편액이 걸린 '대웅보전' 왼쪽 백설당 처마 밑에 걸도록 했다. 꼬장꼬장한 추사가 자신보다 한세대 앞선 원교를 인정한 일화다.

원교는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인연이 깊다. 그는 조선 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 명이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돼 23년간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하며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고 숨을 거두었다. 동국진체는 중국의 서체를 모방하지 않고 우리 글씨를 써보자는 문화운동이다. 청에서 배운 글을 독창적으로 집대성한 추사체(秋史體)와 쌍벽을 이룬다. 지금도 전라도의 많은 사찰에는 원교의 흔적들이 살아 숨 쉰다. 그의 편액 글씨들은 가슴에 맺혀 있는 응어리들이 붓끝을 통해 서리서리 풀어져 획 속에 뼈가 된 듯 얼핏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원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특별한 기회가 생겼다. 광주 동구 서석로 은암미술관(관장 채종기)의 ‘원교 이광사 특별전’이다. 22일부터 8월 11일까지 펼쳐진다. 그의 시문과 서첩, 병풍, 주련, 편액 등 60여점이 선보인다. 작품 한 점 한 점으로 따지면 500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동국진체의 전문 수집가 고송석(65)씨가 20여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이다. 현재 광주·전남지역 서단은 거의 모두가 동국진체의 서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미술관을 찾아 원교의 숨결을 느끼는 피서법도 괜찮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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