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 전주일보
  • 승인 2017.03.2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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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글을 게시한 지 500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 500년은 이 루터의 반박문 게시(1517년 10월 31일)를 원년으로한다. 교황의 권위가 신권이던 시절에 내걸린 루터의 이 논제는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터의 반박문은 혜성처럼 나타난 정치적 흐름이라기보다 그동안 축적된 종교내부의 균열들이 응축돼 폭발한 사건이다. 교회의 권위는 이미 도전받고 있었다. 5세기 말 교권과 왕권이 분리됐고 13세기 말 십자군 원정을 거치며 교회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다. 루터는 교권중심, 교황중심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 개인의 믿음을 강조했다. 현대적 용어로 권위에 바탕해 인간을 조종하고 관리하는 교회 행태를 벗어나고자하는 이성적 질문이었던 셈이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으로 성공한 광부출신 시민계급 한스루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지배계급의 한 부류였던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권유로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어느날 바로 곁에 떨어진 벼락을 목도하고는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안나에게 서원을 맹세했다. 신학을 공부하다 당대 종교의 현실적 모순에 눈을 뜨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95개 논제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에 감히 의심의 잣대를 들이댄 댓가는 컸다. 주장을 거둬들이지 않은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파문 처분을 받는다. 당시 파문은 성직자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이후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의 탄생은 물론 가톨릭 내부의 변화로 이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숭상하며 탄핵반대 집회에 개신교 일부 교회와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하겠다. 지난 3·1절에만 한기총과 한국교회연합이 박근혜 탄핵반대 집회에 교인 2만 명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박 전 대통령 사저 주변에서는 통성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비아냥인지 비유인지 통곡의 벽으로 불릴 정도다. 터전 잃은 유대인들이 한많은 울음을 토했다고 전해지는 예루살렘 유적지를 빗대서 말이다. 당대의 첨단에 서서 현실의 불의와 비틀린 권위에 질문을 던지고 ‘인간’의 얼굴을 찾고자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이 구체제와 잘못된 권위를 영속시키는데 동원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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