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소쇄원
  • 전주일보
  • 승인 2017.02.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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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고유의 전통정원이다. 그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가 지난해 말 전남도와 광주전남연구원의 설문조사를 통해 증명됐다. 전국 15세 이상 1,300명(971명 응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505명(35.5%)이 '한국 전통정원 하면 생각나는 정원'으로 '소쇄원'을 첫손으로 꼽았다. 중복 응답 설문에서 창덕궁 비원 (436명·30.7%)과 경복궁 자경전 (270명·19.0%)마저 소쇄원 다음일 정도였다. 소쇄원과 함께 완도 부용동 정원(125명·8.8%), 강진 백운동 정원(85명·6.0%)도 상위 응답군에 포함됐다. 소쇄원의 지명도만큼이나 방문자가 639명(78.4%)으로 가장 많았으며, 부용동 정원과 강진 백운동 정원은 각각 101명(12.4%), 71명(8.7%)으로 나타났다.

소쇄원의 '소쇄'는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품고있다. 세상의 탁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담고있는 어휘다.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온다. 중국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혼탁한 현실을 떠나 숭안현(崇安縣)의 무이산 계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유유자적한 은둔생활을 했다. 따라서 소쇄원을 짓고 그에서 산다함은 주자가 무이정사에 머물렀음과 상통한다 할 수 있겠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그 소쇄원을 꾸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스승 조광조(趙光祖)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남곤(南袞)등 훈구파에게 밀려 화순 능주로 유배당하자 함께 세상의 뜻을 버리고 담양으로 낙향했다. 낙향한 무등산 자락의 남면 지석리 지석마을 주변은 높지 않은 골에도 물 맑고 경치가 빼어났다. 양산보는 마을 뒷산과 까치봉 사이를 흐르는 계류를 중심으로 원림(園林)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호 '소쇄옹'에서 '소쇄'를 따 소쇄원이라 했다. 원래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800년대 말 중수됐다.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으로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다. 건물, 식물의 명칭을 비롯해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물레방아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소쇄원의 원형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목판에는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題詠)과 우암 송시열의 친필(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이 새겨져 있다. 고경명은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 임훈(林薰)과 무등산을 둘러보면서 소쇄원을 들렀다. 그리고 소쇄원을 중심으로한 계원(溪園)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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