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간통
여성의 간통
  • 전주일보
  • 승인 2016.06.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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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여성의 간통에 매우 엄했던 나라는 로마다. 로마는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면 재산을 몽땅 빼앗고 추방시켰다. 고대 형법인 '앗시리아 법서'에는 아내가 간통을 하던가 심지어 외박만 하고 와도

남편이 죽이거나 귀, 혹은 코를 잘라내도 괜찮았다. '함무라이 법전'에는 간통을 한 여인은 돌을 묶어 매달아 깊은 물에 빠뜨려 침살(沈殺) 시키거나 돌로 때려 석살(石殺) 시킨다고 적혀 있다.

백제는 간통한 여성을 노비로 삼았으며, 후백제의 궁예는 부인 강씨가 왕건과 간통을 했다는 죄로 숯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몽둥이를 강씨의 국부(局部)에 꽂아 죽였다. 고려시대에는 아내가 간통한 경우 남편은 상대 남자를 죽이고 처를 내쫓을 수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대명률(大明律)의 규정에 따라 미혼과 기혼을 불문하고 남녀를 동일하게 처벌했으나, 유부녀의 간통 행위에 대해서는 가중처벌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노비에 대한 간통이었다.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여성 노비는 기혼과 미혼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범할 수 있었는데, 이를 ‘갓김치 먹기’라고도 했다. 노동에 찌든 여종의 몸에서 땀 냄새가 났기에 갓김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차별적인 남성 중심의 성문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개화(開化) 바람이었다. 1889년 3월,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의 덕수궁 앞에서 50여 명의 여인네들이 시위를 벌였다. 여인들은 장대에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一夫二失 悖倫之道 德義之失)’란 글을 매달고 축첩 반대 구호를 외쳤다.

고종 황제에게도 후궁을 물리쳐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했는데, 마침내 1905년 대한제국 형법대전의 간통죄 공표를 이끌어 냈다. 이후 1912년 일제의 조선형사령과 1953년 대한민국 형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간통죄는 그동안 가부장적인 문화의 전통 속에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이나 상처를 받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같이 가부장적 문화권 속에서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손해 받고 불이익을 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즉, 여성의 성해방 이전에는 여성은 연애 등을 즐길 권리가 없었지만 이제는 여성도 성적인 주체로 주장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간통죄 폐지는 이런 시대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윤종채 /무등일보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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